일본어 중역을 알아차리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풍으로) 생각

모 출판사에서 추리소설 선집을 문고판으로 출간한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몇 권을 주문했다. 최근에는 하드커버로 책을 출판하는 것이 유행인 관계로,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기 위해서는 팔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력을 키워 놓거나, 아니면 인터넷 서점을 한 시간 가량 뒤져서 가벼운 책을 찾아야만 한다. 이러다가는 책을 읽어서 눈이 나빠지기 전에 컴퓨터 사용으로 인해 시력이 떨어지는 것이 먼저일 듯 싶다.

미래를 대비해서 팔운동도 좀 한 뒤, 침대에 누워서 새로이 구입한 책을 기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번역이 이상할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조금씩 눈살을 찌푸리게 되지만 가격이 저렴한 것에 위안을 삼으며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책을 읽다가 순간 눈을 의심케 하는 단어가 등장한다. '비차(룩).' 이 시점에서 번역자의 깊은 배려를 알아차린 사람이라면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 큰 관심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라면 글을 마저 읽으면 될 일이다.

체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체스에는 8개의 폰과 8개의 다른 기물들이 있다. 이 '다른 기물'에는 킹(King), 퀸(Queen), 룩(Rook), 비숍(Bishop), 나이트(Knight)가 있다. 인도에서 처음에 장기 계열의 게임을 만들었던 당시에는 참모, 전차병, 상병(코끼리) 였던 것이 유럽에 가서 퀸, 룩, 비숍으로 변질된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 줄 수 있다. 어떤 나라에선 황제가 마을에 시찰나왔다가 장기 두는 사람들을 보고 '이 놀이는 무얼 하는 놀이인가'하고 묻길래, '적군의 왕을 죽이면 이기는 놀이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역모죄로 몰려서 처형당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이 정도의 이름 변화는 매우 준수하다. (이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른 글로 써 볼까 한다.)

다시 본래의 얘기로 돌아와서 '비차(룩)'에서 룩은 까마귀가 아닌 듯 싶으니 체스에서 나오는 그 룩이 맞다. 체스를 좀 아는 사람이 소설에서 룩이라는 표현을 썼다면, 일단 체스말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일 수 있고,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뜻일 수 있다.

1) 왕을 지키는 수호병. 이 경우에는 캐슬(castle)이라는 옛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 이 의미는 다른 장기에는 없고 체스에만 존재하는 캐슬링(castling)이라는 특수규정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체스판의 2인자. 체스에서는 퀸이 압도적으로 강하고, 룩 두 개가 있어야 퀸 하나와 비슷한 (사실은 약간 강하지만) 능력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체스 외의 다른 장기에서는 전차병이 무조건 최강이다. 일본장기(将棋, 쇼기)에서는 또 좀 다른 점이 있는데, 뒤에서 설명할 예정이다.
3) 직선으로 원하는 만큼 갈 수 있는 기물. 본래의 전차병의 이미지이다.
4) 폰을 승진시켜서 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체스 세트를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다 보니 퀸이 하나밖에 없어서 퀸의 대용물이 필요한 시점이 필요한 경우, 옆에 소금병이 보이지 않을 때 뒤집어서 쓸 수 있는 말. (룩은 유일하게 뒤집어서 세울 수 있다.)

체스말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에는, 인터넷에서 이미지 검색을 통해 한 번 실물의 사진을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1), 2), 4)의 의미로 룩이 사용될 때에는 어차피 체스에서만 쓰이는 뜻이므로 달리 번역할 도리가 없다.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바라느니 컴퓨터에 기본으로 깔려 있는 체스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몇 번 체스를 두는 편이 시간절약도 되고 정신건강에도 좋다.

3)의 의미로 쓰였을 때에는 문제가 다르다. 한국에서 두는 장기에도 직선으로 원하는 만큼 갈 수 있는 기물이 있는데, 바로 '차(車)'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전차병이고, 직선으로 원하는 만큼 갈 수 있으며, 인도에서부터 내려온 전통에 맞게 장기판 가장 구석에서 시작한다. (북한에서는 차를 구석에 놓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북한에서 전통을 지키는 방식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다.) 그러니까 이 경우 서양문학에서 '룩(rook)'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룩(서양장기의 말 중 하나. 장기의 차에 해당함) 정도가 맞다고 본다. 장기에서 차가 뭔지 모르는 독자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일본장기에는 직선으로 원하는 만큼 움직일 수 있는 말이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비차(飛車)이고 다른 하나는 향차(香車)이다. 사실 정말로 원하는 만큼 움직일 수 있는 말은 비차고, 향차는 앞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향차의 경우 시작하는 위치는 전차병의 전통을 가진 장기판 구석자리이고, 비차는 뜬금없는 둘째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칸에서 시작한다. 어쨌거나, 3)의 의미로 쓰인 룩은 일본장기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비차는 전차병의 이미지가 아닌 환상의 생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시 다룰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설명을 주의깊게 읽었다면, 비차(룩)이 어째서 나온 표현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원래 영어 사용권에서 쓰여진 작품인데, 일본어로 번역이 된 것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뒤, 그 작품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흔히들 일본어 중역(重譯)이라고 하는 방법이다. 원문에 나온 룩을 일본어로 번역하다 보니 일단 비차가 되었고, 한글로 번역한 사람은 룩이 뭔지도 모르고 비차가 뭔지도 모른채 그냥 일본어를 베껴 쓰다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더군다나, 비차는 사실 룩과 그리 비슷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 장기에서 쓰이는 차가 더 룩에 가까운 형태이다. 그러니 번역할 때 조금이라도 퇴고의 시간을 거쳤으면 비차를 그냥 놔뒀을리는 없다.

번역자에게 최소한의 자각이 있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번역자의 의도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번역자는 지금 읽고 있는 작품이 일본어 중역으로 번역된 작품이라는 단서를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울러 일본어에 대한 지식을 독자 스스로 찾아볼 기회를 줌과 동시에 세계 각국에서 두어지는 다른 종류의 장기를 비교분석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추리소설 선집을 출판하는 참으로 훌륭한 자세가 아닌가.

만약 여러분이 책을 읽다가 '비차'라는 표현을 발견하게 되면, 일단 책을 내려놓고 일본어 공부를 하고 싶어지는 흥분 상태를 가라앉힐 시간을 좀 가지길 바란다. 컴퓨터를 켜서 체스를 한 판 두면 평정을 되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체스를 뒀더니 상대편은 킹만 남고 나는 킹과 룩이 남게 되어 이기게 되는 경기라면 더욱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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